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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체

바티칸의 심장

바티칸

 

세계에 위대한 건축물은 많지만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만큼 많은 사람의 손이 간 건축물은 찾기 어렵습니다.

15세기에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성당건설을 계획하고부터 완성될 때까지 근 350년이 걸렸습니다. 그동안 역대의 교황들과 건축가들이 줄을 이어 저마다 흔적을 남겼죠.

 

콘스탄티누스대제가 사도 베드로를 기념하여 세운 원성당을 헐고 그 자리에 대성당을 세우기로 한 것은 니콜라우스 5세지만 건축공사가 실제로 시작된것은 1505년이 되어서입니다. 그 해에 교황 율리우스 2세는 성당 가까이에 자신의 거대한 기념비를 포함한 영묘를 세울 생각을 했습니다. 그는 미켈란젤로에게 그 일을 맡기고 돈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했을거란 생각이드네요

 

옛 성당의 철거

 

몇 번이나 마음을 바꾼 끝에 율리우스 2세는 자기의 묘를 따로 만드는 계획을 포기하고 원성당을 완전히 재건하기로 했고 합니다. 그는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를 고용했죠. 브라만테는 먼저 콘스탄티누스의 성당과 그 속에 있는 것을 깡그리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는 묘와 조상과 모자이크 , 성화와 재단을 부수었다고 하는데, 이 파괴작업에 몇 주일 동안 2500명의 인부가 동원되었습니다. 브라만테는 천재적인 건축가이기는 했지만 일을 너무 서둔데다가 변덕이 심해 일꾼들을 적절히 감독하지 못했죠. 그가 죽은 뒤 건물에 결함이 드러나 수리하는 데 다시 많은 돈이 들었다고 합니다.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죽자, 그의 후계자인 레오는 라파엘로를 새 건축담당자로 임명했습니다. 라파엘로는 브라만테의 설계를 대폭 수정했으나, 6년 후 그가 죽을 때까지 한 일은 고작해야 기둥 한두 개를 세우고 브라만테의 결함을 수정한 것 뿐이죠.

 

미켈란젤로의 등장

 

1521년에 레오가 죽고 새 교황이 된 클레멘트는 페루찌를 건축책임자로 임명했습니다.

페루찌는 로마에서 많은 건축을 했지만, 등한시된 성베드로대성당을 위해서는 별로 한 일이 없죠. 브라만테가 만든 돌받침대와 아치에는 금이가서 잡초가 자랐습니다. 그 다음 교황 바오르 3세가 이 계획에 새로운 깁김을 불어넣었죠. 그는 스페인이 터기인에 대한 십자군비용으로 맡긴 자금을 횡령하여 먼저 안토니오 다 상갈로에게, 다음에 미켈란젤로에게 건축을 맡겼습니다. 이 위대한 피렌체인은 이때 나이가 72세였으며,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정화를 완성한 후 이미 오랜 세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성베드로대성당의 첫 설계를 마친 것은 1547년이었습니다. 곧 건축에 착수했으나, 1550년 바오로가 죽은 뒤로는 성당건설에 쏟았던 그의 정열도 차츰 식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교황이 그를 격려했지만, 이 위대한 건축가도 나이를 먹으면서 많은 실수를 했죠. 1564년 그가 죽자 혼란이 일어나서 그 교황의 생존 중에는 건축에 아무 진전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의 후계자인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일을 진척시키려고 애썼으나 많은 그의 전임자와 마찬가지로 바란 것만큼 이루지 못했습니다. 많이 아쉬울 것 같네요.

그러다가 식스투스 5세가 교황이 되면서 성당건립계획이 다시 활발히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전임의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일을 했습니다. 이켈란젤로가 설계한 돔은 거의 전부 이때에 완성되었습니다. 시스티나홀 과 바티칸도서관의 건설을 명령한 것도 식스투스 5세였으며, 이 건축물들은 1588년 도메니코폰타나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도서관은 당초 1447년부터 1455년 사이에 니콜라우스 5세가 창설, 300여 권의 책을 보관한 바 있었죠.

 

드디어 완성

 

1594년 교황 클레멘트 8세가 새로 만든 높은 제단에서 첫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그 후 다시 아무 진척이 없는 세월이 흐르다가 교황 우르반 8세가 건축가 베르니니를 끌어들었죠. 그는 교황의 제단을 덮는 천개를 만들고 종룰르 세우고 본당을 장식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세워진 것이 1784년에 완성된 성구 안치소입니다. 이것이 완성됨으로써 성베르도대성 당은 마침내 완공되었죠. 식스투스가 돔을 만든 지 근 200년, 미켈란젤로가 그것을 떠받드는 큰 돌받침대를 만든 지 238년, 그리고 니콜라우스 5세가 콘스탄티누스성당을 다시 짓기 시작한 때부터는 실로 338년이나 지나서였습니다.

 

도서관은 17세기에서 18세기에 걸쳐 상당히 확장되었으나, 1798년에 많은 문헌이 프랑스로 반출되어 심한 타격을 입었다고 합니다.

 

오늘날 이 도서관에는 약 6만 점의 고본, 7천점의 고판본, 10만 점의 조판인쇄물과 지도, 그리고 90만 권이 넘는 서적이 소장되어 있다고 합니다 대단하죠!